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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묻고 답하다 - - 강영안 양희송 2박3일의 대화 (강영안, 양희송)
    review 2020. 3. 15. 12:41

    우연히 서점에서 만난 책,  그리스도인으로써의 많은 고민들의 해답은 될 수 없을지 몰라도 출발점을 될 수 있을 것 같은 책.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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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30>
    불교의 철학적 깊이나 그 물음의 철저성 때문에 한때 불교에 심취한 적이 있어요. 불교 서적을 읽으려고 산스크리트어를 1년 동안 배우기까지 했지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불교만큼 종교와 철학과 과학이 다 섞인 게 없거든요. 불교에는 과학도 있고, 종교도 있고, 철학도 있고, 심지어 정치도 있지요. 불교는 다 섞여 있는, 일종의 종합과학이고 종합종교라고 할 수 있지요. 다양하고 풍부하고 깊기는 하지만 결국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다든지, 삶의 여러 계기를 희석시키고, 희미하게 만들고, 동질화시키는 면이 있지 않나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불교의 깊이를 인정하고 많은 것을 배우면서도 내심 도의할 수 없어요. 불교가 말하는 것이 정말 진실일까 의문을 품고 있죠.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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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47>
    심지어 못질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신체가 노화되는 것이 늙어 감의 경험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것을 더 가중 시키는 게 현대 사회의 방식이지요. 농경 사회 전통을 생각해 보세요. 나이가 든다는 건 기득권의 위치에 오른다는 이야기였어요. 한 집안의 가장이 되고 한 동네의 어른이 된다는 것이었지요. 그럴 수 있었던 건 농경 사회의 지식이라는 경험의 축적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나이가 많다는 건 젊은 사람에 비해 경험이 많다는 말이고, 경험이 많다는 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많다는 것, 따라서 어떤 일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경우 젊은 사람보다는 나이 많은 사람의 지혜에 의존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산업사회' , '정보화사회', 소위 '지식사회'에서 지식이란 끊임없이 변하고, 그런 변화를 습득하고 판단하거나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면 나이 든 사람보다는 젊은 사람이 유리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전통적 농경 사회와 달리 오늘날에는 '나이 듦'은 곧 늙어 감이고, '늙어 감'은 신체적.정신적 쇠퇴일 뿐말 아니라 사회적 위치와 위신이 밀려나는 겁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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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57>
    공감할 수 없고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꼬집어 이야기하자면 어떤 교조적 이념을 지적할 수 있어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는 것, 예를 들어 기독교 근본주의, 이슬람 근본주의,불교 근본주의, 혹은 정치적 근본주의 말입니다. 웃음과 울음의 상황을 뒤바꿔 버린다는 것은 하나의 이념,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일종의 혐의를 가지고 상황을 보기 때문입니다.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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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67>
    그런데 한국 사회는 1990년대를 넘어가면서 소위 '격동의 민주화'와 '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를 꿈꾸던 시대가 와락 무너졌지요.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목숨을 걸 수는 있었지만, 일상을 걸 수는 없었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대단한 열정과 헌신을 요구했던 한 시대가 급하게 저물고 허무, 좌절, 거대담론의 환멸을 느끼면서 커다란 전환을 맞이합니다.
    P68>
    선교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선교사를 많이 파송했지만 무엇을 위한 선교인지 방향이 분명하지 않아요. 앞서 이야기한 관점에서 보면 선교의 목적은 결국 복음을 받고 변화된 성도가 자기 삶을 회복하는 일꾼, 섬기는 자로 활동하는 것이 아닌가 해요. 이렇게 보면 선교는 해외 선교, 국내 선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선교입니다. 세상에서 부름 받고 하나님 백성이 되고 다시 세상에 보내어져서 삶을 회복하는 데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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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75>
    '모든 것이 종교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네덜란드 칼뱅주의자들처럼 '삶이 곧 종교 Life is Religion'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삶의 어느 한부분, 한 순간도 하나님 경배와 무관한 곳은 없다는 의미에서 말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삶의 동기로 애기하는 두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사람 Amor Dei과 자기 사랑 Amor sui 말이지요. 문제는 어느 동기가 삶의 중심에 자리 잡느냐죠.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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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01>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홀로 있을 수 없는 자는 함께 있을 수 없고, 함께 있을 수 없는 자는 홀로 있을 수 없다." 대학 시절에 이 책을 읽었는데 다른 말은 다 잊고 이 말만 뇌리에 깊이 박혔어요. 사람이 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홀로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어야 형제자매와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이 되죠.

     

    P105>
    반대로 오늘날에는 자본주의가 삶의 양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개인주의가 우리 삶을 위협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사회나 교회나 공동체성을 다시 강조한다고 볼 수 있어요. 이러한 시대적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공동체를 강조하다가 미성숙한 인간을 대량 생산한다든지. 강 개인이 단독자로 '코람데오 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 사는 데 무관심해지는 상황을 초래한다면 저항해야지요.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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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20>
    교회 전통을 제대로 보는 데는 시간 거리가 필요합니다. '시간거리'는 철학자 가다머에 따르면 무엇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더 잘 알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예수의 가르침과 능력을 보고서는 어디서 왔는가 물음을 던졌지만 곧장 누구의 형제, 누구의 오빠가 아닌가 하면서 자기 속에 같히고 말았습니다. 예수가 누군지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에야 사람들이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2,00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예수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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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36>
    미국의 복음주의자 로날드 사이더가 <그리스도인의 양심 선언>에서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한국의 현실과 흡사합니다. 책 제목이 마크놀의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과 비슷한데, 놀의 책은 복음주의가 지성 세계에서 어떻게 실패했는가를 보여줍니다. 반면 사이더는 자칭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돈과 섹스와 결혼 생활에서 세상과 다를바 없는 결과를 보인다는 사실을 거론합니다.
    P140>
    왜 한국 교회가 이런 곤경에 처했나요? 예수 그리스도 사건, 그분의 초청과 명령과는 무관한 신앙 양태가 교회를 형성하도록 버려둔 것이 근본적인 이유죠. 이 맥락에서 본회퍼가 이야기 한 것이 '값싼 은혜'입니다.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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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44>
    마침 저희가 머무는 이곳 모세골 예배당 벽에 십자가가 음각으로 되어 있는데요. 사실 그것은 재료를 깎아서 십자가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벽을 파서 벽면의 빈 공간이 십자가를 형성하도록' 한 것입니다. '부재를 통한 임재'라고나 할까요. 신학 전통에도 '부정의 신학'이 있지요.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를 통해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 아닌 것을 언급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죠.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전통임에도 우리가 <밀양>을 이런 방식으로 읽어 내는 시도를 하지 못하고 단순히 반기독교적이라고 반응한 것은 아쉬운 점입니다.
    P148>
    골로새서 1장 15절에 그리스도를 일컬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잖아요. 이때 '형상'이 희랍어로 에어콘 여어로 아이콘이에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죠. 그런데 아이콘은 아이돌과는 달라요. 아이돌은 희랍어 에이돌론 '보이는 것'이란 말에서 나왔는데, 여기에는 보고 싶고 손아귀에 넣고 싶고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투사되어 있어요. 예수는 하나님을 보여 줄 뿐 손에 잡히지 않는 분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를 아이돌(우상)로 만들려고 하지요. 내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삼으려 하죠. 십자가를 양각으로 만들어서 손아귀에 넣어 조종하고자 하는거죠.

    한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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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61>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삶의 열매는 여기서 말하는 '빛의 열매'입니다.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잔실함에 있다고 말하지요. '착함'은 헬라어로 '아가토수네'입니다. 통상적으로 쓰이는 '착하다, 선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뜻합니다.
    P169>
    교회의 모인 사람들의 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각자 처한 삶의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처럼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일 이것이 목회의 척도가 된다면 설교, 교육, 양육 방식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입과 마음으로 구주와 주로 고백하는 것이 일차적입니다. 다른 주인을 더 이상 섬기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삼위일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삶의 전환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삶의 전환이 일어난 사람은 예수를 선생으로, 함께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형님으로, 앞서 걸아간 삶의 모범으로 삼아 예수를 닮아 예수처럼 세상을 살아갑니다.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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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82>
    특별히 예언자 호세아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할 때, '지식'이란 무슨 과학에 관한 지식이나 경제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어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할 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강조하지요. 여호와를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 백성 사이에 없다고 할 때는, 진실로 정의로움이 없고 거짓과 살인과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하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실천적 행위, 즉 자비를 베풀고 정의를 세우고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돌보지 않는 것을 두고 한 말이지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렇듯 이론적 지식이기보다는 실천적지식, 실천적 앎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의롭고 공정하게 살면서 자비를 베풀고 가난한 자와 나그네들을 생각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P187>
    예수님의 메시지가 무었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어요. '회개하라'는 헬라어로 '메타노에이터'이지요. 직역하면 '지성을 완전히 바꾸라'는 말입니다. 지성의 변화 없이 하나님의 나라에들어갈 수 없다는 것 아니겠어요? 이때 지성은 지성 따로, 영성 따로, 덕성 따로의 지성이 아닐 거예요. 구체적인 삶과 행동을 제어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마음의 태도, 삶의 태도, 생각의 방식을 모두 총칭하는 말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생각의 변화 , 사고방식의 변화 없이는 참된 회개가 없어요. 결국 이것은 삶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 드러나고 증명되는 것이지요.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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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97>
    16세기 네덜란드의 신학자요 법학자인 휴고 그로티우스가 '마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전제하고서 자연법 문제를 다룰 것을 권했습니다. 말하자면 '방법론적 무신론'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방법론적 무신론'과 존재하는 것은 오직 자연뿐이고 초자연적인 개입이나 영향은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학문하도록 요구받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희랍 전통에서 형성된 학문과 신앙과 학문을 통합적으로 이해하자는 성경적 전통의 격차가 분명히 존재해요. 격차가 없다거나, 쉽사리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나는 희의적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하고픈 이야기는 우리조차 전적으로 방법론적 무신론과 방법론적 자연주의 입장에 서서 학문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P201>
    마이클 폴라니는 그리스 전통과 기독교 전통의 만남으로 근대 과학이 가능했다고 보았지요. 근대 과학의 발생에 동력 역할을 했던 기독교가 이제 영향력이 감소되면서 오히려 과학의 진로에 장애가 생긴다고 폴라니는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아니, 인문학이든 간에 과거의 학문 이념은 '진리 탐구'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진리'란 단어는 학계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말이에요. 지식이란 말만 남았어요. '지식 경제', '지식 창출', '지식 생산','지식 확산'등 지식이란 말은 많이 쓰지만 진리는 학계에서 사라진 단어입니다. 과학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과학 연구 목적이 무엇인지 규정하기가 이제 그만큼 힘든 것이지요. 산업에 기여하여 경제적 부를 창출하는 것을 떠나서 과학을 이야기하기 힘들게 되었어요. 그런데 아직도 물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과학자를 보세요.
    P206>
    우리는 객관성을 추구해야 하지만 객관주의는 과학에 대한 잘못된 이상이라 보는 것이지요. 과학 지식은 '개인적.인격적 헌신'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힌 것도 폴라니의 공로입니다. 앞에서 애기한 것처럼 "너희가 믿지 않으면 알 수 없으리라"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을 폴라니는 일종의 모토로 사용합니다.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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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213>
    마르크스나 니체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혹시 속임이나 착각이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보게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가 '만들어 낸'하나님일 수 있어요. 자유주의자를 닮은 하나님, 사회주의자를 닮은 하나님, 성공의 하나님 등등,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투사시켜 하나님의 모습을 빚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거든요. 바르트 와 본회퍼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나는 생각해요.
    P217>
    '실제적 무신론' 또는 '실전적 무신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입으로는 인정하고 종교행위에 참여하면서도 생각과 삶으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무신론이지요. 이런 무신론이 두려워해야 할 무신론입니다.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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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226>
    잘 알려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는 세 윤리가 다 적용됩니다. 우선 사마리아인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윤리'를 준수했어요.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만난 사람이 유대인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고 그가 고통 받는 이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따라 마땅히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윤리적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덕의 윤리'의 입장에서 봐도 선한 사마리아인은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를 했습니다. 이웃을 돕고 필요한 상황에 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은 성품과 품성으로 형성된 습관을 행하는 일입니다. '피해자 중심의 윤리'에서 보면 사마리아인은 고통 받는 사람의 고통을 보고는 자기 희생을 감수하고 개입하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자원을 사용하새 상대를 치료해 주고 다시 노새에 태워 여관에 보내서 그를 끝까지 치료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지요. 상대를 향한 고통의 눈이 열려서 그러한 윤리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세 가지 윤리를 다 적용할 수 있어요.
    P232>
    교회가 단순히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방주, 즉 "우리는 구원 받았다","우리는 천국 티겟을 받아 천국 가는 기차에 승차하고 있다"라는 식이 아니라,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일시적인 거주자로서 세상의 고통과도, 세상의 기쁨과도 함께하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품을 때 한국 교회는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알까 해요.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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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47>
    그의 책에 나타난 복음에 대한 태도나 전도에 관한 이해나, 사회변혁에 대한 이해가 사실상 로잔언약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왜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했더니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아요"라고 하잖아요. 깜짝 놀랐지요.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을 읽지않는다니, 다시 한번 쳐다보니 "그들은 인용하고 암송은 하지만, 성경을 읽지는 않아요"라고 해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요. 복음주의자들의 칭의는 이야기하는데, 사회정의에는 무관심하고, 성경이 '총체적인 구원'을 이야기하는데 복음주의자들은 '영혼 구원'만 이야기하고,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게 아니라 부분적으로, 원하는 내용만 읽는다는 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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